[한국법률일보] 명예훼손 혐의 내용의 현수막 수거 및 게시금지 가처분 결정을 받고 현수막을 철거한 후 표현만 일부 수정해 다시 게시했다면, 이는 연속된 하나의 범죄가 아니라 별개의 범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법원의 가처분 결정에 따른 제재를 회피하기 위해 기존 현수막을 철거하고 내용을 변경해 새로운 현수막을 게시한 행위는 ‘범의(범죄 의도)의 갱신’으로 보아야 한다는 취지다.
대법원 제3부(재판장 노경필 대법관, 주심 이흥구 대법관, 오석준·이숙연 대법관)는 명예훼손과 옥외광고물등의관리와옥외광고산업진흥에관한법률(‘옥외광고물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김모씨 사건 상고심에서 공소를 기각한 1·2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돌려보내는 판결을 지난달 30일 선고한 것으로 24일 확인됐다.
법원에 따르면, 김 씨는 2017년 12월 중순부터 2018년 1월 하순경까지 서울 서초구의 하이트진로 본사 사옥 앞에, “서울고등법원 행정재판에서 위증과 위조 허위자료 제출 등을 해가며 싸워···서울고등법원 행정소송 재판 중 위증 위조 허위자료 제출 패소” 등의 내용이 포함된 현수막을 가로수, 전봇대 등 사이에 내걸었다.
김 씨는 이 선행행위로 기소돼 2021년 10월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로 벌금 500만 원의 형이 확정됐다.
문제는 이 선행 사건 재판이 진행되던 중의 김씨의 행보였다.
2018년 3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하이트진로가 제기한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면서, 김씨에게 “피해회사 사옥 앞 경계로부터 200m 이내에서 ‘갑질, 허위자료 제출, 피고인이 운영하는 회사 죽이기, 대리점 갈취, 피고인이 운영하는 회사를 피해회사가 망하게 하였다는 내용, 피해회사가 관련 소송 혹은 수사과정에서 위증․위조․허위자료를 제출했다는 내용, 피해회사가 국정감사를 방해할 목적으로 검찰과 사법부의 직권을 남용토록 해 피고인을 구속시켰다는 내용’ 등이 포함된 현수막을 게시해서는 안 된다. 위 의무를 위반할 경우, 피해회사에게 위반행위 1일당 500,000원씩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이에 김씨는 2018년 4월 9일경 기존 현수막을 철거하고, 새로운 현수막을 내걸었다. 새 현수막에는 가처분에서 금지된 직접적인 문구 대신 “언론을 매수해 국민의 눈과 귀를 막았다.···기사댓글을 조작했다.”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김씨의 이러한 행위를 별도의 명예훼손과 옥외광고물법위반으로 보고 추가 기소했다.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A씨의 1차 현수막 게시(선행 사건)와 문구를 바꾼 2차 현수막 게시를 ‘포괄일죄(수 개의 행위가 하나의 죄를 구성)’로 볼 것인지 여부였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두 사건을 포괄일죄로 판단하고, 피고인이 선행 사건에서 이 사건과 포괄일죄의 관계에 있는 범죄로 기소되었으므로, 이중기소에 해당한다면서 공소기각과 항소기각 판결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가처분 결정’과 ‘현수막 교체’라는 사실관계에 주목했다.
대법원 제3부는 “범의의 단일성과 계속성은 개별 범행의 방법과 태양, 범행의 동기, 각 범행 사이의 시간적 간격, 그리고 동일한 기회 또는 관계를 이용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후속 범행이 있었는지, 즉 범의의 단절이나 갱신이 있었다고 볼 만한 사정이 있는지 등을 세밀하게 살펴 논리와 경험칙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기존 법리를 확인하면서, ‘범의의 단일성과 계속성’ 판단에 있어 법원의 가처분 결정과 같은 외부적 요인에 의한 범행 중단 및 내용 변경을 범의 갱신의 중요한 징표로 인정할 수 있음을 명확히 했다.
대법원 제3부는 “가처분 결정에 따라 피고인이 선행 현수막을 수거함으로써 범행이 일시나마 중단되었고, 피고인은 가처분 결정에 따른 제재를 회피하기 위해 선행 현수막의 표현과는 다소 다른 내용의 현수막을 새로 게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면서, “그렇다면, 선행 사건 공소사실과 이 사건 공소사실 사이에는 범의의 갱신이 있었다고 할 것이므로, 선행 사건 공소사실과 이 사건 공소사실은 포괄일죄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제3부는 아울러 “이 사건 공소사실 중 명예훼손 부분에 관하여는 공소제기된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확인하고, 불분명한 부분은 검사에게 석명을 구하는 등으로 그 공소제기 부분을 명확하게 한 다음, 공소제기된 범위에서 심리․판단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해 둔다.”고 부연했다.
이 사건은 파기환송됨에 따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피고인 김씨의 2차 현수막 게시 행위에 대한 재판을 다시 진행되게 된다.
이번 판결은 집회·시위 현장에서 법원의 금지명령 등을 교묘하게 우회하려는 시도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시민을 위한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한국법률일보’ 손견정 기자 lawfact.des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