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법률일보] 음주 상황에서의 성범죄 사건에서 가해자의 ‘알코올 블랙아웃’ 주장을 배척하고, 피해자의 만취 상태를 ‘항거불능’으로 인정해 성범죄 가해자의 준강간죄를 유죄로 판단한 판결이 나왔다.
광주고등법원 전주제1형사부(재판장 양진수 고법판사, 김수민·조호연 판사)는 준강간 혐의로 기소된 30대 남성 B에 대한 항소심에서 “원심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을 징역 3년에 처한다. 다만 이 판결 확정일로부터 5년간 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피고인에 대해 80시간의 성폭력 치료강의 수강을 명한다.”는 판결을 최근 선고했다.
대한법률구조공단에 따르면, 20대 여성 A는 2023년 5월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의 협력업체 대표 B(30대 남성)와 회식에 참석했다. 당시 A는 평소 주량인 소주 1병을 넘어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는 등 과음을 했다. A의 남자친구는 영상통화에서 A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취한 상태였다고 진술했고, 회식에 동석했던 다른 직원 역시 A가 휘청거릴 정도로 만취했다고 증언했다.
회식 후 A가 술에 취해 항거불능 상태가 되자 B는 이를 이용해 A를 간음했다.
A는 범행을 인지하고 경찰에 신고했고, 법률구조공단 소속 피해자 국선변호사의 법률지원을 받게 됐다.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A와 면담을 통해 피해자의 입장이 재판에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조력했다.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피해자가 사건 당시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였는지 여부였다.
B는 이 재판에서 A가 범행 당시 의식상실 상태가 아니었고, 그 후에 기억하지 못할 뿐인 이른바 ‘알코올 블랙아웃’ 상태에 해당하고, 합의하에 성관계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 1심은 맡은 전주지방법원 제11형사부(재판장 김상곤 부장판사, 김진웅‧오서진 판사)는 A가 사건 당시 술에 취해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고, B씨는 이를 인식하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유죄로 판단해, “피고인을 징역 3년에 처한다. 피고인에게 8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한다.”는 판결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판결 이유에서 “피해자가 깊은 잠에 빠져 있거나 술·약물 등에 의해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은 상태 또는 완전히 의식을 잃지는 않았더라도 그와 같은 사유로 정상적인 판단능력과 대응·조절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면 준강간죄에서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해당한다. 피해사실 전후의 객관적 정황상 피해자가 심신상실 등이 의심될 정도로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었음이 밝혀진 경우 혹은 피해자와 피고인의 간계 등에 비추어 피해자가 정상적인 상태하에서라면 피고인과 성적 관계를 맺거나 이에 수동적으로나마 동의하리라고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운 사정이 인정되는데도, 피해자의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피해자가 단순히 ‘알코올 블랙아웃’에 해당해 심신상실 상태에 있지 않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대법원 2018도9781 판결을 인용했다.
1심 재판부는 또한 “피해자 A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된 점, 사건 직후 A가 남자친구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고 병원에서 사후피임약을 처방받는 등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하기 어려운 행동을 보인 점 등”을 근거로 A의 진술 신빙성을 인정했고, B가 제출한 성관계 당시 녹음파일에서 A의 반응은 외부 자극에 대한 단순한 반응일 뿐 제대로 된 의사 표현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면서, B가 녹음을 통해 향후 성범죄 혐의를 피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도 지적했다.
B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장을 제출했으나 항소심에서는 피해자 국선변호사를 통해 범행을 전부 인정하고 피해자와의 합의를 요청했다. A는 숙고 끝에 6천만 원의 합의금을 받고 B와 합의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B씨가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고, 피해자와 원만히 합의해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한 점, 초범인 점, 원심 선고 시 법정구속돼 약 8개월간 구금 생활을 한 점 등의 정상을 참작해 징역 3년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 소송에서 피해자 A를 대리한 법률구조공단 소속 원명안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음주 관련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의 상태를 보다 엄밀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판례다. 단순히 피해자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준강간죄 성립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중요한 법리가 적용됐다.”면서, “피해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피해자에 대해 최대한 범행사실을 입증할 수 있도록 자료 제출을 조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공단은 앞으로도 성범죄 피해자의 권리보호와 법적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시민을 위한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한국법률일보’ 손견정 기자 lawfact.des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