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법률일보] 좌회전하는 길이 없는 곳임에도 ‘좌회전 시, 보행신호 시’ 유턴할 수 있다는 신호등 보조표지판이 설치된 교차로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적색신호에 유턴하다 발생한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20대 젊은이의 부모가 관할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지자체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2017년 3월 당시 24세이던 황모씨는 친구 2명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와 각각 원동기장치자전거(오토바이)를 대여했다. A씨 등은 오토바이를 운전하던 중 서귀포시의 한 삼거리 교차로에서 유턴하기 위해 유턴 전용차로인 1차로에 정차해 신호를 기다렸다.
당시 그 교차로는 좌회전할 수 없는 ‘ㅏ’ 형태의 도로였는데, 황씨는 신호등이 녹색에서 적색(보행신호도 적색신호 상태)으로 변경되자 유턴을 하던 중, 반대편에서 직진 및 좌회전 신호에 따라 시속 약 71㎞의 속도로 직진 중이던 트랙스 자동차와 오토바이 뒷부분이 충돌했다. 황씨는 이 사고로 외상성 경막하 출혈 등의 상해를 입어 혼수상태에 빠졌고, 이후에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해 식물인간이 됐다.
당시 교차로에 설치된 신호등에는 유턴 지시표지와 ‘좌회전시·보행신호시 / 소형 승용, 이륜에 한함’이라는 보조표지가 있었으나, A씨의 진행방향에서 좌회전하는 길은 없었다.
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황씨의 부모는 “이 사건 신호등에 좌회전 신호가 없기 때문에 표지에 좌회전 시 유턴하게 돼 있는 부분은 신호체계와 맞지 않았고, 또 신호등을 바라보고 운전할 때 왼쪽으로는 좌회전할 수 있는 길이 없어 교통표지가 도로구조와도 맞지 않아 이는 영조물의 하자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면서 제주특별자치도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 1심을 심리한 서울서부지방법원 제12민사부는 "표지판 중 ‘좌회전시 유턴’ 부분이 도로 및 신호등 현황과 맞지 않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황씨가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려 ‘보행신호시’에 유턴을 함으로써 충분히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도로표지의 하자에 해당하지 않고 설사 하자라 보더라도 교통사고와 인과관계도 없다."면서 원고패소 판결했다.(서울서부지방법원 2020. 10. 21 선고 2020가합34394)
그러나 항소심의 판단을 달랐다. 서울고등법원 제18 민사부는 “이 사건 표지에는 교차로의 도로구조와 맞지 않는 기능상의 결함이 존재하고 그와 같은 기능상의 결함은 <국가배상법> 제5조 제1항에 규정된 ‘영조물의 설치 또는 관리상의 하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하면서, "제주특별자치도는 원고들에게 2억5천여만 원을 배상하라"는 원고일부승소 판결을 했다.(서울고등법원 2022. 2. 18. 선고 2020나2039267 판결)
1·2심의 엇갈린 판결에 이 사건은 대법원으로 갔고, 대법원 제2부(재판장 조재연 대법관, 주심 이동원 대법관, 민유숙·천대엽 대법관)는 상고심 사건이 접수된 지 4개월만에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는 파기환송 판결을 선고했다.(대법원 2022. 7. 28. 선고 2022다225910)
대법원 제2부는 판결이유로 “이 사건 표지에 신호등의 신호체계와 교차로의 도로구조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통상 갖추어야 할 안정성이 결여된 설치·관리상의 하자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이 사건 표지의 내용으로 인해 운전자에게 착오나 혼동을 가져올 우려가 있는지 여부는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운전자의 인식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이 사건 표지의 내용에 일부 흠이 있더라도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운전자의 입장에서 상식적이고 질서 있는 이용 방법을 기대할 수 있다면 이를 이유로 이 사건 표지의 설치 또는 관리에 하자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설시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 교차로에는 좌회전할 도로가 설치돼 있지 않았고 신호등에 좌회전 신호도 없었다. 따라서 이 사건 표지에 따라 유턴이 허용되는 두 가지의 경우 중 신호등이 좌회전 신호가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없으므로,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운전자라면 이 사건 표지에 따라 유턴이 허용되는 경우는 보행자 신호등이 녹색 신호일 때 유턴을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사건 사고 이전에 표지가 잘못 설치됐다는 민원이 제기되지 않았고 이 사건 표지로 인한 사고가 발생한 적이 없다는 사정도 그와 같은 점을 뒷받침한다.”고 판시했다.
이에 재판부는 "그럼에도 원심은 그 판시와 같은 이유만으로 이 사건 표지에 설치·관리상의 하자가 있다고 보았으니, 이러한 원심의 판단에는 영조물의 설치·관리상의 하자에 관 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면서, "그러므로 나머지 상고이유에 관한 판단을 생략한 채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판단하도록 원심법원에 환송하기로 해 관여 대법관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고 밝혔다.
시민을 위한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한국법률일보' 김명훈 기자 lawfact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