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팩트 손견정 기자] 보수 성향이 짙은 대법원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왔던 이상훈 대법관이 6년의 대법관 재임기간을 포함해 33년 5개월여 동안의 법관생활을 마치고 27일 퇴임했다.
27일 오전 11시 대법원 본관 중앙홀에서 열린 이상훈 대법관 퇴임식 장면(대법원 제공) |
이상훈 대법관(61세, 사법연수원 10기)은 이날 퇴임사에서 “법관은 다른 사람이 밝힌 의견을, 그리고 그 근저의 생각을 존중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를 뿐 틀린 것이 아닙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 하여 등을 돌린다든지,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배려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옳지 못합니다. 자신이 미리 정해놓은 잣대로 타인을 재단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법관은 이래야 한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상훈 대법관
이 대법관은 “생각의 폭과 깊이를 늘려야 합니다. 법해석을 맡고 있는 법관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의 서로 다른 측면들을 모두 아우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면서 “형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허약한 쪽에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단순한 기계적인 균형은 형평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헌법과 법률의 대원칙들이 구호나 구두선에 그치게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서, “죄형법정주의와 무죄추정의 원칙을 입버릇처럼 되뇌면서도 정작 사건에 임해서는 유죄추정이 원칙인 것처럼 재판한다든지, 언필칭 공판중심주의라면서도 실제로는 수사기록중심주의로 재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2015년 8월 불법 정치자금 9억원을 받은 혐의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유죄가 확정된 한명숙 전 국무총리 사건의 주심이었던 이상훈 대법관이 이인복ㆍ김용덕ㆍ박보영ㆍ김소영 대법관과 함께 “공판중심주의, 직접심리주의 원칙과 전문법칙의 취지에 비추어, 동일인의 수사기관 진술과 법정 진술의 내용이 정반대일 경우 법정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하고 수사기관 진술을 증거로 삼으려면 이를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자료가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공개된 법정에서 위증죄의 부담을 지면서 쌍방의 신문을 거친 법정 진술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한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명제와 증거재판주의 원칙을 그저 헛된 구호에 그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던 당시 소수 대법관 5인의 반대의견을 떠올리게 한다.
이 대법관은 또한 “조세법률주의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도 실질과세원칙을 들이밀어 형해화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국고가 빌 것 같다는 걱정을 법관이 앞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신의성실의 원칙을 함부로 끌어 쓰는 것은 위험합니다. 합리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면서, “국가경제와 기업의 안위를 아예 도외시해서는 안 되겠으나 그것이 법원칙을 압도할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법의 핵심임무는 각종 권력에 대한 적정한 사법적 통제를 통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법관은 이 임무를 어떻게 하면 성실하게 다할 수 있을 것인지를 끝없이 고찰해야 합니다”라고 당부했다.
이러한 당부는 이상훈 대법관이 2013년 12월 통상임금에 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당시 이인복ㆍ김신 대법관과 함께 다수의견에 반대하여 “법률상 통상임금에 해당하는 정기상여금 등을 통상임금 산정에서 제외하기로 하는 노사합의가 강행규정인 근로기준법에 위반되어 무효임에도 불구하고, 다수의견은 신의칙을 근거로 그 무효주장을 제한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는 강행규정의 입법취지를 몰각시키는 결과이므로 부당하고, 신의칙을 적용하기 위한 일반적인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일 뿐만 아니라 다수의견이 제시한 신의칙위반의 근거나 기준에 합리성이 없기 때문에, 신의칙 적용에 찬성할 수 없다”고 밝혔던 소수 대법관 3인의 반대의견을 생각나게 한다.
끝으로 이 대법관은 “사건의 결론을 섣불리 내려두고 거기에 맞춰 이론을 꾸미는 방식은 옳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정확하게 사실관계를 확정하고 거기에 치밀한 논증을 거쳐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리 하지 않는다면 곤란합니다. 법관이 재판하는 것은 고민을 거듭하는 고단한 일이어야 합니다. 함부로 결단을 해버리려는 태도는 책임질 일을 하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법관이 법기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항상 삼가고 어려워해야 합니다”라고 법관의 무거운 책임의식을 강조했다.
이상훈 대법관은 1956년 10월 9일 광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 중이던 1977년 제19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1983년 9월 법관으로 임용되었고 인천지방법원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이후 서울지방법원 동부지원, 대구고등법원, 서울고등법원 판사,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연구심의관,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등으로 근무하였으며, 대전고등법원,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수석부장판사, 제주지방법원장, 인천지방법원장을 거쳐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재직 중 2011. 2. 28. 양승태 전 대법관의 후임으로 대법관에 임명됐다.
그는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로 재직하며 공판중심주의와 불구속재판 원칙의 확립에 온 힘을 기울였고, 인신구속업무 처리기준을 정립하고 영장업무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검사가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검사의 지시에 따라 검찰주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정함으로써 적법절차의 준수를 강조했고, 언론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허용한도를 초과한 보도에 대하여는 엄한 책임을 묻는 판결을 선고했었다.
이 대법관은 이른바 대법원의 '독수리 5형제'로 불렸던 박시환ㆍ김지형ㆍ김영란ㆍ이홍훈ㆍ전수안 전 대법관의 퇴임 이후 보수색이 짙어진 대법원에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었던 사건 판결 시 이인복 전 대법관과 함께 상대적으로 진보 성향의 목소리를 내왔으며, 자신의 대법관 취임사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엄정한 법률 이론과 아울러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깃들여 사건마다 혼을 불어 넣는 자세를 잃지 않는 재판을 해왔다고 평가된다.
이상훈 대법관은 퇴임 후 사법연수원 석좌교수로 활동하면서 당분간 후진 양성에 힘쓸 계획이며, 이 대법관의 후임 임명 절차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의 영향으로 사실상 보류돼 대법원은 당분간 대법관 1명이 빠진 13인 체제로 유지된다.
다음은 이상훈 대법관의 퇴임사 전문이다.
27일 퇴임사를 하고 있는 이상훈 대법관(대법원 제공) |
존경하는 대법원장님과 동료 대법관님 그리고 저의 대법관 퇴임식 자리에 함께해주신 법관과 직원 여러분께 먼저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오늘 6년 대법관 재임기간을 포함하여 33년 반 동안의 법관 생활을 마칩니다. 세월이 제법 길기는 하였지만 어찌 보면 한 순간이었습니다. 지나간 많은 일들이 뚜렷이 기억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먼저 무얼 잘했다는 감상이 별로 들지 않으니 제가 훌륭한 법관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6년 전 이곳에서 대법관 취임식을 가졌을 때, 저는 ‘사건마다 혼을 불어 넣는 자세를 잃지 않을 것이며, 그러면서도 개별 사건의 해결에 몰두한 나머지 법의 원리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사색하고 숙고하겠다. 임기를 마쳤을 때 그런대로 괜찮은 대법관이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다짐을 어기지 않으려고 제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는 했습니다. 그래도 애만 쓰고 이룬 것은 없습니다. 사람 사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어서 어쩔 수 없겠으나, 그다지 후회되지는 않는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 듯합니다.
저의 법관생활을 돌이켜보니 ‘법관은 이래야 한다.’는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 몇 말씀 드릴까 합니다. 이것은 그러지 못한 제 자신에 대한 질책이며 반성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밝힌 의견을, 그리고 그 근저의 생각을 존중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를 뿐 틀린 것이 아닙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 하여 등을 돌린다든지,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배려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옳지 못합니다. 자신이 미리 정해놓은 잣대로 타인을 재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의 폭과 깊이를 늘려야 합니다. 법해석을 맡고 있는 법관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의 서로 다른 측면들을 모두 아우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형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허약한 쪽에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단순한 기계적인 균형은 형평이 아닐 것입니다.
헌법과 법률의 대원칙들이 구호나 구두선에 그치게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죄형법정주의와 무죄추정의 원칙을 입버릇처럼 되뇌면서도 정작 사건에 임해서는 유죄추정이 원칙인 것처럼 재판한다든지, 언필칭 공판중심주의라면서도 실제로는 수사기록중심주의로 재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조세법률주의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도 실질과세원칙을 들이밀어 형해화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국고가 빌 것 같다는 걱정을 법관이 앞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신의성실의 원칙을 함부로 끌어 쓰는 것은 위험합니다. 합리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국가경제와 기업의 안위를 아예 도외시해서는 안 되겠으나 그것이 법원칙을 압도할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법의 핵심임무는 각종 권력에 대한 적정한 사법적 통제를 통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법관은 이 임무를 어떻게 하면 성실하게 다할 수 있을 것인지를 끝없이 고찰해야 합니다.
사건의 결론을 섣불리 내려두고 거기에 맞춰 이론을 꾸미는 방식은 옳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정확하게 사실관계를 확정하고 거기에 치밀한 논증을 거쳐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리 하지 않는다면 곤란합니다. 법관이 재판하는 것은 고민을 거듭하는 고단한 일이어야 합니다. 함부로 결단을 해버리려는 태도는 책임질 일을 하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법관이 법기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항상 삼가고 어려워해야 합니다.
이제 이 자리를 마무리하면서, 여러모로 부족한 저를 판사로, 대법관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동료 법관들과 법원 직원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께 더할 나위없는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한없는 아늑함을 주는 제 처를 비롯한 가족에게도 쑥스럽지만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저의 후임 대법관이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떠나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루 빨리 이런 상황이 끝나기를 고대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해온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 법원과 우리나라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고, 이 자리를 따뜻하게 해주신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행운이 넘치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감사합니다.
2017. 2. 27.
대법관 이상훈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팩트(LawFact) 손견정 기자 lawfact.des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