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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독립유공자 후손 가족 국적증서 수여식’에서 독립유공자 후손 배우자인 김춘자님 등이 박상기 법무부장관에게 귀화자 선서를 하고 있다.(법무부 제공) |
이날 국적증서를 수여받은 이근수 독립유공자 손자의 배우자인 신옥자(63세)씨는 “이 나이 되도록 면접이라는 것을 봐 본 적이 없어요. 한국말은 잘 하는데 면접문제가 어려워서 자꾸 떨어졌다.”면서, “면접시험이 면제돼서 이제 한국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니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했고, 허주경 독립유공자 손자의 배우자인 김춘자(63세)씨도 “남편이 독립유공자 후손이라도 한국 국적 따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들어서 불안했어요. 남편과 자식들은 모두 한국에 귀화했는데”라면서, “이제 저도 가족들과 함께 한국인으로 살 수 있게 됐다니까 너무 기쁩니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박상기 장관은 이날 축사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독립유공자들의 고귀한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면서, “법무부는 앞으로도 독립유공자 후손 가족들이 국내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이날 국적증서를 수여받은 귀화자 명단과 독립유공자의 공적개요다.
귀화자 명단 및 독립유공자 공적개요
연번
| 독립유공자(운동계열/훈격)
| 후 손(유공자와 관계)
| 귀화자(후손의 배우자)
| 비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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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차도선(의병/독립장)
| 외증손녀
| 박대로(68세/남)
| 귀화 전 국적: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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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조근백(의병/애국장)
| 증손녀
| 이덕원(67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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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허주경(만주방면/애국장)
| 손자
| 김춘자(63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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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오주혁(만주방면/애국장)
| 외증손자
| 설순화(61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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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이근수(만주방면/애국장)
| 손자
| 신옥자(63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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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이경재(만주방면/애국장)
| 외증손녀
| 김정산(64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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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채관(만주방면/건국포장)
| 손녀
| 조범국(63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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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도선
대한제국군 진위대의 하사(下士)로 복무. 1907년 홍범도(洪範圖)와 의병을 일으켰으며, 1919년 4월에는 신봉황(申鳳荒)과 함께 충의사(忠義士)를 조직하여 2백 명의 독립군을 모집, 훈련시켜 국내진입 계획 세움. 동년 9월에는 무송현(撫松縣)에서 약 5백 명의 독립군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등 무장 항일투쟁을 계속/
2. 조근백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가 경북 영천(永川)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하자 그 휘하에 들어가 영양(英陽)·청송(靑松)·진보(眞寶) 등지를 전전하며 활동. 그 뒤 이듬해 7월 입암(立岩) 전투에서 정용기 의병장이 전사하고 의진이 해산되자, 은둔하였으나 1908년 6월 20일 자택에서 일군에게 피살.
3. 허주경
함북 회령(會寧) 부근에서 항일활동을 하던 중 1920년 10월 27일 일군의 습격을 받아 순국.
4. 오주혁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항의하여 진신유생(縉紳儒生)들과 상소운동을 전개. 1910년 8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유인석, 이상설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인 성명회(聲明會)에 참여. 이후 중국 혼춘(琿春)과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톡을 오가며 교육사업 및 군자금 모집, 무장투쟁 등을 병행. 1922년에는 흑룡강성 오운현 배달둔에서 조직된 항일무장단체 혈성단(血誠團)의 일원으로 활동.
5. 이근수
1911년 중국 서간도(西間島)로 이주한 후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마호구(馬毫溝) 한인학교(韓人學校)에서 한문교사로 활동하며 항일의식을 고취. 서로군정서 총재(總裁)로부터 조선특별파견원(朝鮮特別派遣員)으로 임명. 1920년 5월에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24년 5월 8일 순국.
6. 이경재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군에 가담하여 의군단(義軍團) 참모(參謀) 겸 비서(秘書)로 활동. 동단(同團)은 청산리 전투, 특히 어랑촌 전투에 참가하여 큰 전과를 올림. 1920년 11월 일군(日軍)에게 저항하다가 순국.
7. 채관우
1928년 4월 중국 북간도 왕청현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29년 9월 제2차 간도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고 경성감옥에서 복역.